제주 멸치 어업, '식민지 어업구조'로 전락…일제에 의해 독점 당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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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멸치 어업, '식민지 어업구조'로 전락…일제에 의해 독점 당해
  • 제주관광신문
  • 승인 2019.06.14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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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바다’그 무한한 가치의 재발견 10. 바닷물고기 잡이 역사
제주 사람들이 멸치잡기를 위해 테우를 띄운 모습.

제주도에서도 어선을 이용해서 어업을 하기 시작한 때가 일제강점기부터이다. 2차 대전 이후에는 합성섬유제망이 개발되고 1920년에 어선의 동력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도민들 최초로 했던 어업은 좀녀들이 전복, 미역, 해삼 등을 채취하는 잠수, 낚시, 석방렴이 있었다. 돌맹이로 돌담을 쌓아서 만든 게 원담이다. 석방렴은 멸치, 고등어를 원담에서 썰물이 되면 뜰망채로 건져 올리는 방법이다. 여기서 길이 1길 2자 정도, 깊이 5~6자, 손잡이 길이 2길 6자 정도의 뜰망채(족바지)가 사용한다.
1900년 이후 제주의 어업은 멸치잡이와 함께 변화를 맞게 된다. 멸치는 조선시대 때는 학질을 일으킨다고 해 천한 물고기 취급받았지만 일본이 제주어장에 등장하면서 멸치를 이용해 비료, 어유, 마른 멸치용 원료로 사용하기 시작하자 비싼 물고기로 변하면서 어민들은 예망이외의 다른 그물을 사용해 멸치를 어획하게 됐다.
끌거나 당길 수 있도록 그물양쪽에 연결한 줄을 예망이라고 한다. 제주에서 예망업은 코지에서 멸치가 들어 올 때 기다렸다가 멸치 때를 그물로 에워싸서 당긴 후 썰물이 되면 멸치를 잡는다. 그물은 면사로 폭 5~6심, 길이는 지역에 따라 다르게 만든다. 연안 암초가 많은 모슬포 지역에서 활발했고 어장은 7곳 정도 이었다. 천연 모래사장에는 예망 어장이 아닌 곳이 없을 정도이다.
바다에 넓게 들러 친 후에 그물양쪽에서 여러 사람이 끝줄을 잡아당겨 물고기를 잡는 것이 후릿그물이다. 후릿그물은 자루달린 지예망으로 작은 것은 20심, 큰 것은 100심, 폭은 양끝이 1심, 가운데 약 5심, 여기에  길이 130~150심이나 된다. 즉 예망 끝을 잡고 멸치 때를 모래사장으로 모이게 한 후 썰물이 되면 가두어진 멸치를 퍼 올린다. 어장은 모래사장이고 폭이 좁다. 큰 어장은 사계리에 약 1리, 5~6정(500~600m)정도, 큰 것은 10정 정도이며 이같은 규모를 넘는 어장은 드물다. 적은 어장은 조합이 하나를 독점하기도 하지만 여러 조합이 공유하기도 하고, 어장에 여러 개의 그물을 설치할 수 없기에 윤번제로 하기도 한다.
또 다른 멸치잡이로 방진망이 있다. 그 구조는 후릿그물과 거의 같지만 예망이 있다. 이 방법은 연안암초가 많지 않고 후릿그물 사용이 어려운 곳에서 사용한다. 조업방법은 멸치 때가 연안에 보이면 그물을 던져 수중에서 원형으로 에워싸서 모래밭으로 그물을 끌어서 올려서 멸치를 수확한다. 항상 그물의 반은 수중에 깔아 놓는다.

그물 눌

또 다른 방식은 장망인데 일종의 부망으로 후릿그물, 방진망을 쓰기 전에 사용했다. 그 구조는 길이 15심, 폭10심이 되는 장방형에 네 귀퉁이에 예망을 붙인 것으로 4~5 명이 타는 어선 4척이 어장에 나와 그물을 던져 아랫 그물은 잠기게 해서 멸치 때를 모아서 끌어올리면 바구니로 들어간다. 한편 망사지는 거의 면사를 사용했고 고내, 곽지, 애월 ,금성, 금릉, 귀덕, 하귀에서 생산, 어부들이 직접 그물을 만들었다. 
이런 후릿그물과 방진망 어업은 개인이 운영하기보다 지역의 어장에서는 어업계가 조직해 운영을 하였다. 어업계는 공동출자, 공동노동, 공동분배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어획한 멸치 유통과정은 일본 중매인이 미리 어업자금을 빌려주고 시세에 따라 멸치로 받아간다. 특히 후릿그물 어장을 일본 상업자금이 고리대금 성격을 띠고 종속되어갔다. 일본이 제주어장을 종속시켜 나가는 과정에 자원의 남획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제주어민들의 삶은 더욱 궁핍해 졌다. 멸치는 일본 침탈과 마을 단위 어장이 자본력에 의해서 공유화되고 종속되는 중심에 있었다. 일본 규슈에서 운반선이 와서 매집하기도 하고, 일본인 아라카와는 곽지를 근거지로 마른멸치와 멸치지게미를 제조했다. 성산포에 한국물산회사도 멸치지게미를 제조했다. 이렇게 멸치를 통해 식민지적 어업구조로 재편되고 일제에 의해 독점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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