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중요한 뱃길 중간 기착지…바다 신에 제사 지내는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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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중요한 뱃길 중간 기착지…바다 신에 제사 지내는 사당
  • 한기완 기자
  • 승인 2019.06.14 12: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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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춘 여기 어디우꽈? 11 화북 해신사

제주도 4면을 따라 흐르는 해류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고대에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뱃길을 만들었다. 그런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제주는 중요한 뱃길에 중간 기착지였다. 이곳은 왜구와 해적의 노략질도 빈번했었기에 중앙정부에서는 군사적인 방어시설과 바다신에게 국태민안을 기원하기 위해 해신사도 세웠다.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22호로 지정된 해신사를 통해 제주의 값어치를 새롭게 평가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편집자 주-

제주시 화북동 해신사.

어느날 포구로 들어오던 목사를 태운 배가 풍랑을 만났다. 과거 화북포구는 포구로 들어오는 항로에 모래가 많고 수심이 얕아 선박출입이 위험했다. 그런 상황에 풍랑을 만난 배는 배 밑창으로 큰 구멍이 뚫리면서 침몰 위기에 놓였다. 그때 바다 속에서 큰 뱀이 나타나 자신의 몸으로 구멍을 막고 안전하게 배를 포구로 인도하여 일행들의 생명을 건질 수가 있었다. 이에 신기하게 여긴 목사가 이곳에 사당을 만들고 매년 1월 6일에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제주시 화북동 화북포구에 해신사가 있다.
배비장전 주 무대가 되었던 화북포구는 동력선이 나오기 전까지는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들이 제주를 드나들 때 많이 이용했던 관문이었고, 화북마을은 반드시 거쳐 가야하는 길목이었다.

추사 김정희와 면암 최익현 선생도 화북포구를 통해 오고갔다. 뿐만 아니었다. 한양으로 보낼 조공과 무역선단도 이곳에서 입출항 했다. 이처럼 무역이 이루어지는 곳은 노략질할 대상이 많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이곳에 남해안 일 때를 무대로 일삼는 왜구와 해적들이 빈번히 출몰했다. 그래서 화북포구는 군사적 요충지로 화북진성을 더욱 견고하게 축성을 했고, 곤을동 환해장성과 별도환해장성까지 쌓았다.
특히, 화북 진성은 조선 시대 때 제주도의 군사적 방어시설인 화북 진이 설치되었던 자리이다. 진은 변방 방어를 위하여 북변과 해안지대에 구축된 군사행정구역으로서, 조선 시대에 들어 왜구의 방어를 위하여 남방 연병에 많이 설치되었다. 조선 후기에 9진으로 정착되어 모든 진에 성이 축조되었다. 이들 가운데 하나가 화북진이다. 이원진의 『탐라지』에 의하면 화북포구에는 판옥전선이 중부, 좌부, 우부에 각각 1척씩 있었다. 또한 비상 양곡이 6석, 격군이 180명, 사포가 87명 있었다고 한다. 진성의 규모는 둘레 303보, 높이 10자로, 조방장을 두고 있을 정도로 제주에는 주요한 군사적 요충지임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통신시설이 발달하기 전, 적의 침입 등 위급한 일이 있을 때 도내 각처에 빠르게 연락했던 통신망의하나인 별도 연대도 건설하여 화북포구는 완벽한 군사요새를 건설했다.

그러나 제주를 방어하는 제주 목사는 그래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공포가 밀려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원래 화북진 자리에는 조선 초기부터 화북 수전소가 자리를 하고 있었다. 그 후 1555년 6월에 왜구 침입으로 무너졌다. 이곳을 통해 상륙한 왜구는 곧바로 진격하여 제주 성을 3일간 포위하여 치열한 격전을 벌이던 끝에 물러난 사건이 있었다. 이후 화북진이 설치되었다. 이처럼 이곳을 지키는 목사의 마음은 아마도 해신사에 전해오는 전설이 말해주는 것처럼 바다 신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연유로 화북포구 가운데 바다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당인 해신사가 건립되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해신사는 조선시대 순조 20년인 1820년에 당시 제주목사가 지었는데, 여러 차례 장소를 옮겨 다녔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의 해신사는 1975년 새로 지어졌다. 당시에 조선은 유교를 숭상하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샤머니즘적인 사당을 지었다. 바다 신에게 제사를 지내며 의지할 만큼 불안하고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를 지키려는 간절한 마음으로 안전을 기원하였을 것이다.
제주시 화북동 화북 진성을 지나 화북포구 가운데로 작은 사당인 해신사가 경건하게 서 있다. 마치 작은 암자처럼 보이지만, 화북포구에서 육지로 왕래하던 관리들이나 상인들이 여기에서 문안을 드리고 안전을 기원했던 곳이다. 해신사는 1820년경부터 유교식 해신을 모셔 해상안전을 기원하였다고 전한다. 그 후 동력선이 출현하고 산지포구가 제주항으로 격상하면서 화북 마을 어부와 해녀가 중심이 되어 점차 해상안전과 바다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방향으로 무속적인 해신당의 구실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현대에 들어서면서 마을의 안녕과 수복을 기원하는 유교식 마을제로 다시 회귀하여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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