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딸들' 해녀의 삶 노래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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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딸들' 해녀의 삶 노래로 전한다
  • 한기완 기자
  • 승인 2019.06.28 09: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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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노래 기능보유자 김영자씨
공동으로 우뭇가사리를 채취하는 현장.
공동으로 우뭇가사리를 채취하는 현장.

1960년대 만 해도 제주에는 2만 명의 해녀가 살았고, 제주에는 온 바다는 자맥질 소리와 함께 숨비 소리가 가득했다. 그런 해녀의 삶은 자연스럽게 제주의 역사와 문화가 되었다. 제주 해녀 문화 속의 삶에서 알 수 있듯이 바다의 순환 체계를 따라 공동체 삶을 살아가는 해녀 문화의 큰 가치를 세계가 주목하여 유네스코에 올렸다. - 편집자 주 -

유네스코가 주목한 제주 해녀의 큰 가치

해녀노래 기능보유자 김영자씨
해녀노래 기능보유자 김영자씨

해녀는 스스로 바다의 딸이라고 한다. 바다에는 용궁이 있고 그 주변으로 전복과 소라가 지천으로 깔려 있고 사방은 온통 꽃으로 가득하다고 한다. 용왕은 용궁을 찾아온 딸들에게 올 때마다 빈손으로 절대 돌려보내지 않는다. 이처럼 바다의 딸들의 이야기를 전해줄 제주지방무형문화재 제1호 해녀 노래 기능보유자 김영자 해녀를 찾았다.

김영자 해녀가 살고 있는 제주시 구좌읍 행원리로 만나러 간 날은 옥빛바다 물결 위로 해녀의 자맥질 소리가 온 마을이 들썩였다. 

5월부터가 우뭇가사리 철이라고 한다. 이때쯤이면 마을에 해녀들은 모두가 동시에 바다에 나간다. 소라, 전복, 물고기와 달리 바다의 부동산이라고 할 정도로 민감한 해조류는 분쟁이 나지 않도록 함께 채취해야 한다는 엄격한 규율이 있다. 특히 우뭇가사리는 건강식품이나 화장품 원료로 비싼 가격으로 팔려나가 제주 해녀들에게는 바다의 황금이라 불릴 정도로 소득 작목 중의 하나이다.

우뭇가사리 철이 되면 남자들도 일손을 모아 바다로 마중 나간다. 마중은 물질 나간 아내의 망사리를 받아주는 것을 제주 해변 사람들은 마중이라 한다. 바닷속에서 참고 참았던 숨에 무게만큼이나 망사리 가득 채워진 우뭇가사리를 보면서 마을 사람들은 입가에 미소가 가득하다.

물질을 은퇴한 김영자 해녀도 옆에서 일을 거들고 있었다. 그녀는 우리 일행을 보자 반갑게 맞이해준다.

고된 우뭇가사리 채취 작업은 해녀가 하고 뭍에 올라온 망사리 옮기는 일은 남자들이 하는 것이 신기해서 먼저 김영자 해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제주 해녀는 육지 여자들처럼 남자에게 경제적인 부분을 의존하지 않는다"며 "내가 바다로 나아가서 물건을 많이 해오면 우리 아이들 배불리 먹일 수가 있었다"라고 했다.

물질 나간 아내의 망사리를 받아 주기 위해 마중나간 남편들.
물질 나간 아내의 망사리를 받아 주기 위해 마중나간 남편들.

이날도 마을 사람 온 가족이 총동원된 까닭에 행원리 마을회관 마당은 우뭇가사리 냄새로 가득했다.

이 마당이 우뭇가사리로 가득 찰 때까지 행원리 해녀들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숨을 참으며 자맥질을 했고, 그녀들을 마중하기 위한 가족들의 기다림은 얼마나 했을까 하는 상념에 잠시 들었다.
 
해녀의 삶과 문화 유네스코에 등재

김영자 해녀는 13살 때부터 어머니로부터 해녀를 배웠다. 제주의 많은 해녀는 배꼽이 바다에서 여물었을 만큼 어릴 때부터 물질을 해왔다. 태왓의 밧줄은 물 밖과 속을 연결해 주는 탯줄과 같은 생명줄이었다.

그래서 해녀들에게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칠성판을 등에 지고 혼백 상자를 머리에 이고 들어간다고 할 정도로 위험을 무릅쓰고 작업을 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해녀들에게 숨을 참을 수 있는 시간은 1분 내외라고 한다. 그러므로 욕심 때문에 호흡 시간을 놓치면 물숨을 먹게 되고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해녀는 칠성판을 등에 지고 산다는 뜻일 것이다. 이렇듯 물속에서 나오는 순간 해녀가 아니면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허파가 빠져나올 듯이 내는 숨비소리 내뱉으며 무려 80살이 넘을 때까지 물질을 해왔다는 김영자 해녀. 할머니도 그랬고, 어머니도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해녀 무대는 비단 제주바다뿐만이 아니었다.

김영자 해녀는 13살에 어머니에게 해녀를 배우고 21살에 결혼하자마자 앞으로 세상에 태어날 아이들을 잘 먹일 수 없음을 안 그녀는 어린 나이로 부산으로 넘어갔다. 부산은 제주처럼 해녀들이 많지 않았기에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이 많았다. 부산에서 울산으로 전라도로 전국을 누비며 7년간의 해녀 생활을 이어갔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지을 작은 밭도 장만하고 6남매를 키우며 지금까지 물질을 해왔다고 한다.

지금도 우리나라 연안 곳곳에는 고향 제주를 떠나 원정물질 해녀의 숫자가 수만 명에 다다른다. 해산물이 있고 어디든지 초청받은 곳이 있으면 달려갔던 해녀. 그러나 아무리 먼 곳으로 떠나도 이들의 챙긴 소지품은 비창, 호멩이, 족쇄눈 같은 단순한 것이었다.     

이렇듯 해녀들에게는 서로가 꼭 지켜야 할 규약을 만들어 남획하지 않고 자연의 순환 체계를 따르며 살아가는 것뿐만 아니라 생태적 공동문화를 유네스코가 주목한 제주 해녀의 큰 가치 중의 하나였다.

숨 쉴수 있는 어떤 도구도 없이 맨몸으로 바다에 뛰어들어 해산물을 얻어냈고 자식을 키웠던 바다에 딸들. 지역적 독특함과 조화를 이룸으로써 정책성을 마련하고 자연과 친화를 통해 이어왔던 해녀들의 삶과 문화가 마침내 인류의 가슴을 향해 걸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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