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문대 할망의 이야기 속에 조천 사람의 진취적 기상을 엿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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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대 할망의 이야기 속에 조천 사람의 진취적 기상을 엿보다
  • 한기완
  • 승인 2019.04.29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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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역사를 이끌어온 선비정신의 고향, 조천 ②

[편집자 주] 조천리는 제주도의 가장 대표적인 설화 설문대할망이 이야기가 전해오는 곳이다. 이번 삼촌! 여기 어디우꽈? 766호에서는 조천사람들의 애국애족이 정신의 근원을 들여다봤다.

하늘이 처음 열리는 곳이란 뜻의 조천리(朝天理)는 제주시에서 동쪽으로 12km쯤에 위치한 해안마을이다. 조천은 제주도에서 육지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 그것은 옛날 설문대 할망이 제주 사람들의 숙원이었던 육지와 제주를 잇는 다리를 놓다가 만 흔적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멀고도 아주 먼 옛날 제주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장신인 설문대 할망이 살았었다. 그녀는 신체가 한라산보다 더 크고 아무리 깊은 제주 앞바다도 무릎에 닿았다 할 정도로 상상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런 장신의 설문대 할망은 사람들에게 속옷 한 벌만 만들어 주면 육지와 걸어서 갈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 주겠다고 했다. 도민들은 그때부터 할망의 속옷을 만들기 위해 명주 옷감을 구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거구인 할망의 속옷에 들어가는 명주 옷감은 만만히 안 했다. 속옷을 만들려면 50필이 1동이었던 명주가 100동이 필요했다. 99동은 채웠지만, 1동이 모자라 결국에는 속옷을 못 만들자 화가 잔뜩 난 설문대 할망은 다리를 놓던 다리를 모두 허물어버렸다. 그 허물다 약간 남아있는 것이 지금의 엉장매동산(엉장매코지) 이다.
조천 포구는 육지와는 도내에서 제일 가까울뿐더러 지정학적으로 선박 입출항하기에는 가장 안전한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육지를 드나들 때는 조천포구를 많이 이용할 수밖에 없었고 제주도의 다른 곳보다 먼저 육지의 새로운 선진 문물과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으로 조천은 예로부터 유림학자(孺林學者) 유사들의 배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조정에서 파견되는 수많은 역사 목사와 유배 자의 출입이 빈번했었다.
이러한 선비들이 정치적 사명을 띠고 제주도로 올 때 조천을 통해 맨 처음 들어왔으므로 조천 사람들은 제주도의 어느 마을보다도 먼저 그 소식을 접했을 것이며 체험했을 것이다. 이로 인해 자연스레  그들은 강인한 기질과 성품을 배웠고 그 결과 불의에 굴하지 않고 먼저 생각하는 기질이 만들어 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정신이 애국애족이 정신으로 발전하여 독립투쟁의 인맥을 형성하며 항일운동을 주도하였고, 격동하는 근·현대사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 조천은 서 있었다.

역사와 자존의 고장, 조천

만세동산은 일제 강점기 3·1운동 당시 제주도에서 맨 처음 독립 만세의 함성이 터져 나온 곳이다.
제주의 만세운동은 3월 21부터 24일까지 나흘 동안 이어졌다. 연일 수백 명이 모여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후 제주의 젊은이들이 민족의식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이곳 출신 김봉각 선생은 그 영향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1940년 5월 일본 대판에서 독립운동 비밀조직인 계림동지회를 조직하여 활약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그리고 그는 광복 후 처음으로 고국을 방문하여 1991년 사재 5억 원을 출연하여 조천만세동산 3·1 독립기념탑을 세우는 데 큰 힘을 보태었다. 그 후 그 주변은 본격적인 성역화 사업이 시작되어 마침내 제주 항일기념관이 개관되기에 이르렀다.
지금도 이곳에는 매년 3·1절이 되면 선열들의 뜻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해 이곳에서 기미독립운동 만세 대행진이 열리고 있다.

제주 역사를 이끌어간 선비 마을

설문대 할망이 육지와 다리를 놓으려던 곳이 조천의 '엉장매코지'이다. 이 설화의 무대가 말해주는 것처럼 조천은 육지와 교통을 연결하는 뱃길이 중심이었음을 짐작한다.
육지를 잇다만 다리의 흔적만 남겨 놓고 떠나버린 설문대 할망의 뒷이야기는 그 이후로 끊어졌지만,   지금은 그 바다 위로 연육의 꿈은 바다에는 쾌속정과 하늘에는 대형 항공기가 제주도민의 꿈을 이뤘다.
이처럼 조천포구는 많은 제주사람이 이곳을 통해 꿈과 희망을 갖고 육지를 오갔던 곳이다. 곧은 절개와 기상을 지닌 선비들이 정치적 이유로 제주로 귀향 올 때도 이곳을 통해 들어왔다. 조천 사람들은 자연스레 그들의 강인한 기질과 성품을 배웠다. 이러한 선진 문명을 일찍이 접한 조천 사람들은 나라가 위기에 처해있을 때마다 맹수가 세상을 포효하듯 구국을 위해 들불처럼 일어났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파고다 공원에서 일어나자마자 제주도에서 유일하게 조천에서 독립선언문 낭독과 함께 전개되었다. 이 사건이 말해주듯 제주의 역사를 한발 앞서서 이끌어온 선비정신으로 도탄에 빠진 조국을 구하기 위한 몸부림을 쳤던 조천 사람들의 애국애족 정신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한기완 기자 / hankiwan@hanma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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