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애뜻한 사랑이야기를 담은 절부암ᆞ김대건 신부가 표류하다 귀착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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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애뜻한 사랑이야기를 담은 절부암ᆞ김대건 신부가 표류하다 귀착한 곳
  • 한기완
  • 승인 2019.05.09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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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산봉과 용천수로 좁지물이 소재하며 철새도래지인 용수저수지가 있는 마을. 맑은 물이 솟아나는 연못에 유래하여 물과 논의 있어 풍요로운 땅, 아름다운 간절한 사랑이 전설 있고, 김대건 신부가 라파엘 호를 타고 제주에 첫발을 디딘 마을이기도 한, 전설과 역사가 살아 있는 용수리. 
옛 제주 사람들은 한라산을 중심으로 제주를 동서남북으로 나누어 순서대로 말, 곡식, 부처,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서쪽 지역은 평평하고 광활한 곳에 꽃이 산만하게 활짝 핀 듯한 형상이 마치 곡식과 유사하여 토질이 비옥하여 농사가 잘된다고 했다. 제주 서부의 풍요로운 땅의 시작은 용수에서 시작되어 고산을 지나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까지 이어진다. 서부지역의 광활한 평야 지대는 제주에서는 이곳의 유일하고 그 중심에 용수리가 있다. 
용수리는 제주시 서쪽 끝 현재 용당리에 있는 용못에서 유래되었다. 그리고 이 용못은 가뭄에도 물이 아주 잘 솟아나 다른 마을 사람들이 숭숭물이라고 불리며 좋은 물이 많이 나는 곳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마을이다.

아름다운 전설이 전해오는 마을

용수리로 들어가는 어귀는 고산리와 당산봉을 경계로 시작된다. 당산봉을 배경으로 펼쳐진 마을 길에는 간혹 보이는 차들 사이로 펼쳐진 들녘이 평화롭고 호젓하다. 마을 주위가 밭으로 에워싸고 있다는 데서 연유하여 붙여진 주전동에는 청보리와 마늘 수확을 기다리고 있다. 키 낮은 집사이로 작은 골목들이 아름다운 동화처럼 이어져 있다.
용수포구로 들어서면 양옆으로 용수리 마을 방사탑 1호와 2호가 포구와 마을을 외호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로 슬픈 사연이 깃든 절부암이 자리를 하고 있다.
용수리 포구에는 사철나무, 동백나무, 포나무 등 난대식물 군락을 이루고 있는 곳에 절부암이 눈에 띈다. 처음 보는 사람이면 누구나 큰 절에 작은 암자처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작은 바위에 불과하다.

조선시대 말기쯤에 용수마을에 열아홉 살 난 고 씨 처녀와 강사철 총각이 결혼하고 살았었다.
강사철이가 하루는 배를 타고 차귀도에 대나무를 베러 갔다가 풍랑을 만나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남편을 기다리다 지친 고 씨 부인은 포구 나무에 목을 매고 죽어버렸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남편의 시체가 부인이 목을 매단 나무 밑 바다에 떠올랐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중국의 고사, 아버지가 강에 빠져 죽은 후 울다 따라 죽은 어린 딸이 아버지 시체를 안고 떠올랐다는 이야기와 같다며 하늘이 낸 열녀라 칭송하였다. 당시 대정판관이었던 신재우는 고 씨 부인의 일을 조정에 알리고 부부의 시신을 합장하여 장례를 치러주었다.
고 씨가 자결한 바위에 '절부암'이라 새기고 그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제전을 마련하여 용수리 사람들로 하여금 매년 음력 3월15일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만대에 기리게 하였다고 한다.
이 제사는 그 날에 지금도 계승되어 제주에서 열리는 대표적인 포제로 자리 잡고 있다. 시신이 밀려왔다는 바다는 포구로 매립이 되어 저만큼 밀려나 있고, 일부종사를 최고의 미덕으로 살았던 시절의 비통한 사연이 전해오는 것이다.
절부암을 중심으로 배들이 드나드는 포구 양쪽에 직선거리로 200~300m로 새원탑과 화성물탑이 양쪽으로 2개의 방사탑이 세워져 배가 무사히 통과하도록 재앙으로부터 막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올레 13코스도 절부암 아래 포구에서 시작되는 데 이곳에는 한국 천주교 첫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사제서품을 받고 한국으로 향하던 중 풍랑으로 표류하다가 귀착한 곳이다.

서부지역의 광활한 평야 지대는 제주에서는 이곳이 유일하고 그 중심에는 용수리가 있다.

 

풍요로운 땅이 시대에 밀려 새로움이 움트고 있다

포구를 빠져나와 다시 마을로 들어서면 마을회관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농로로 들어서면 이 마을 과 함께 해온 팽나무와 눈을 맞이한다. 팽나무를 받쳐둔 것은 동네 사람들이 여름철이면 사랑방 역할을 하는 돌과 시멘트로 쌓은 쉼터였다.
마을 사람이 말해준다. "원래는 이 동네가 논이 많아 집집이 연자방아가 있을 정도로 많았었다"며 "그러다가 동력이 들어가는 방앗간이 나오면서 연자방아는 쓸모가 없게 되어 연자방아 돌은 팽나무 아래 쉼터가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부터 시대도 변하고 마을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는 사람은 많아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이주민들의 유입 하면서 새로운 희망을 만들고 있다.

<한기완 기자 / hankiwan@hanma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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