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한 마음이 이뤄지길 소원하며 걷는 발걸음은 멈춘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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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한 마음이 이뤄지길 소원하며 걷는 발걸음은 멈춘줄 모른다
  • 한기완 기자
  • 승인 2019.09.22 13: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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곶자왈 숲에는 초록으로 감추어진 듯 아늑하다
광령2리 마을회관 앞 팽나무에는 오고 가는 사람들의 잠시 머무는 곳이다.
광령2리 마을회관 앞 팽나무에는 오고 가는 사람들의 잠시 머무는 곳이다.

  길은 태곳적에도 있었다. 태고에서 시작된 길 위에서 수많은 사람은 그곳을 걸으며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그 길에는 많은 사람이 애환이 서려 있다. 그리고 옛사람들이 걷던 그 길 위에는 옛 선현들이 지나갔던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있는 제주시 애월읍 광령리를 따라 걸었다. 한가위가 끝난 옹기종기 모여 사는 마을의 전경은 분주하고도 평온하다.

  백제사에서 법장사로 향하는 길목은 양옆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감귤나무에 탐스럽게 커가는 열매들이 포도송이처럼 가지마다 주렁주렁 달렸다. 세상사 영원한 것이 없듯이, 1970~1980년대까지만 해도 대학나무라고 할 정도로 귀하고 귀하던 나무도, 지금은 흔하디흔한 과실수에 불과하여 누구도 눈길을 보내는 이 없고 관광객에게만 고즈넉한 여운만을 남겨준다.

  혼자 걷는 길은 고독하다. 입은 굳게 다물고 있지만, 머릿속 가득히 온갖 번뇌 망상이 유영한다. 그러나 떠나온 길이 멀어지고 멀어질수록 잡다한 수많은 번뇌가 처마에 달렸던 고드름이 하나씩 떨어지듯이 결국에 내 마음속 간절한 만이 남는다.

  침묵 속에 걷다 보면 영혼을 맑게 해주고 새로운 나를 찾아가는 환한 등불에 길잡이가 바로 도보여행의 참맛인가 싶다.

마을에 굿은 액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거악대물' 모습.
마을에 굿은 액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거악대물' 모습.

  마을 길을 따라 걷다 보니 광령 2리 마을회관이 가까워질 때는 마을에 굿은 액을 막기 위해 용천수가 솟아나는 샘터에 돌이나 나무로 사람 형상을 제작하여 세웠다는데 연유하여 붙여진 '거악대물'이 나온다. 그리고 그 용천수를 지나자마자 광령2리 마을회관 앞에선 오래된 팽나무가 관광객을 맞이한다.

  비옥한 농지와 온화한 기후 등 입지 조건이 좋아 고려 중엽부터 유목민들이 거주하였다는 설이 전해오고 있는 광령 2리는 거악대물의 용천수를 중심으로 설촌 한 후, 오늘날까지 약 400년 동안 마을을 형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느 중산 간 마을의 특성이 그러하듯 광령리 역시 유교적 전통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타 종교에 대한 신앙이 없었다. 그리고 부녀자들 사이에서 토속 신앙인 '할망당'의 유일한 신앙이었는데 근래 들어 차차 부처님의 큰 가르침이 널리 퍼지기 시작하면서 불교가 이 지역에도 정착되었다.

마음의 평화를 일으키는 인적이 드문 농로안 올레길.
마음의 평화를 일으키는 인적이 드문 농로안 올레길.

  광령2리 마을회관 팽나무 그늘에서 커피 한잔과 싸 온 음식을 나누어 먹고 난 후 다시 길을 떠난다. 순례 길은 점점 마을을 지나 인적이 드문 농로로 들어선다. 바람 많은 이곳에 바람을 피하고자 방풍림이 우거지고, 그곳으로 눈 비비며 날아드는 참새는 먹이를 구해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듯 이리저리 분주하다. 마을길에서 참새들 역시 인간세상 살아가는 방법과 같음을 일깨워준다.

  마음의 평화를 위해 떠나는 길. 속살을 드러내 놓았던 곶자왈 숲에는 초록으로 감추어진 듯 아늑하다. 그 길 사이로 이내 마음의 또렷해지고 생각하고 행하는 모든 인연이 모여들어 세계를 이룬다. 누구라도 지니고 사는 간절한 마음이 보고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며 걸었던 그 길 위에서 여행객의 발걸음은 멈춘 줄을 모른다.

  1300년에 고려 충렬왕(26) 때 반도에서 제주로 불교가 처음 전해 내려왔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이전에도 탐라의 진상 물을 가지고 육지로 간 왕자나 귀족들은 팔관회나 연등회 등의 행사에 참석했다는 기록들이 남아 있다. 그러나 본격적인 대륙불교를 접하게 된 계기는 삼별초가 제주에 상륙하면서부터 여몽 연합군이 삼별초를 진압하고 난 이후 제주가 몽골의 완전한 식민지 지배체제로 들어서면서다. 그 이후 제주에는 몽골의 간섭과 더불어 한라산의 영험한 기운을 통해 국태민안을 도모하기 위해 외도 수정사를 비롯하여 영험한 지역을 찾아 비보 개념의 대형사찰들이 창건되었다. 대륙의 사찰 양식이 들어오면서 마침내 탐라는 기존의 남방으로부터 전래한 제주불교와 대륙불교가 합쳐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 제주에 대륙에서 처음으로 흘러와 통합된 제주불교의 시작점이 항파두리를 중심으로 고성, 광령 일대로 보인다.

  농로가 끊기면서 흙길로 이어진다. 소나무와 삼나무가 우거진 사이로 구름도 가는 걸음이 지쳐서 쉬어 가려고 사바세계로 내려오고 더위에 지친 산새도 이제야 마음이 흥겨운지 멈췄던 노랫가락을 뿜어낸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도채비(도깨비)가 출몰할 정도로 인적이 뜸했던 이곳에 언제부터인지 분위기와 경치가 빼어나 곳곳에 많은 펜션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모든 자연의 아름다움을 몇몇 사람만이 공유하기에는 안타까움만이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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