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와의 문물 교류가 활발했던 '제주의 관문'
상태바
외부와의 문물 교류가 활발했던 '제주의 관문'
  • 한기완 기자
  • 승인 2019.10.21 12: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선조들의 모습과 과거와 현재, 미래가 역동하는 마을
외부와의 문물 교류가 활발했던 제주의 관문 화북포구의 모습.
외부와의 문물 교류가 활발했던 제주의 관문 화북포구의 모습.

제주시 화북동은 화북포구를 통해 외부와의 문물 교류가 활발하였던 제주의 관문이었다. 옛 이름은 벨돗개 혹은 벳뒷개으로 불렀었고, 문헌상 화북(禾北)이라는 명칭은 17세기 중반부터 사용되었으나 이보다 먼저 별도(別刀)라는 이름이 쓰였다. 그 후 근세 이르러 잠시 공북리(拱北里)라 불리다가, 화북으로 다시 바뀌어 현재까지 행정 지명으로 사용되고 있다.

화북천이 흐르는 일주도로(1132번) 원명선원 입구에서 남쪽을 보면 제주에 역동적인 산업 현장인 화북공업단지가 동쪽으로 길게 펼쳐져 있다. 화북천을 경계로 서쪽에는 제주의 초등학교 교사를 양성하는 제주대학교 교육대학이 있고, 동쪽으로는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동계 정온, 청음 김상헌, 우암 송시열 등 다섯 분 현인의 정신을 기려 개교한 오현고가 있다. 집안이 흥하려면 글 읽는 소리와 아기 울음소리, 그리고 베틀 소리가 끊이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이 세 가지를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는 화북동은 예나 지금이나 제주의 중요한 지역임을 느낄수 가 있고 제주의 밝은 미래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오현고 동쪽 옆으로 난 골목길은 구한말까지만 해도 육지와 연결하는 화북포구로 들어가는 큰 도로였다. 아마도 지금에 제주국제공항으로 들어가는 공항로만큼이나 예전에는 복잡한 도로였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공적비보다 목사들이 공적이나 석별의 뜻을 기리는 비가 많이 있는 비석거리 사진.
마을 사람들이 공적비보다 목사들이 공적이나 석별의 뜻을 기리는 비가 많이 있는 비석거리 사진.

화북동 해안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군대 분열을 하듯 서 있는 여러 기의 비석이 방문객을 환영이나 하듯이 맨 먼저 일행들을 맞이한다.

제주 마을 입구에는 마을과 관련된 사람의 공적을 새긴 비석들을 종종 볼 수가 있다. 통상 이를 비석거리라 한다. 화북 비석거리도 마을 포구 근처 도로변에 13기 비석이 세워져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 시대 때 화북포구는 조천 포구와 함께, 육지를 오갈 때 많이 이용했던 곳이다. 그런 연유로 화북 비석거리에 비석에는 마을 사람들이 공적비보다 제주 목의 지방관들이 외관으로 부임하거나, 이임했던 목사들이 공적이나 석별의 뜻을 기리는 비가 많다. 비석거리를 보면서 당시에 화북이 육지의 선진문화를 제주에서 제일 먼저, 그리고 많이 접할 수 있던 곳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화북동에는 그런 영향 때문인지, 예로부터 선각자를 많이 배출하였다고 한다.

기암괴석을 이루며 낭떠러지 절벽이 장관을 이룬 화북에서 보는 별도봉 사진.
기암괴석을 이루며 낭떠러지 절벽이 장관을 이룬 화북에서 보는 별도봉 사진.

화북에서 보는 별도봉은 기암괴석을 이루며 바다로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 절벽이 장관을 이룬다. 별도봉 남쪽 기슭은 화북천이 흘러내리고 별도봉 동 북측으로 별도천을 건너 화북포구를 중심으로 자연마을을 형성한 전형적인 해변 마을이다.

화북에는 지금까지 아물지 않는 4·3의 쓰라린 상처가 남아있다. 지금은 올레 코스의 한 길가이기도한 별도봉 끝자락에 위치한 잃어버린 곤을동 마을이다. 별도봉 골자기에 자리한 안곤과 화북천의 두 지류 가운데 위치한 가운데 곤, 그리고 밧곤으로 세 개의 마을이 있었다.

1949년 1월 4일 5일 양일간에 국방경비대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고 불태워져 사라져버린 마을이다. 이곳이 마을이었다는 것은 곤을동 팻말과 4.3 유적지임을 알리는 표시판을 통해서나 알 수 있다.

바다와 바위로 이루어진 마을에는 척박한 불모지만 있을 뿐, 지금도 포구 주변으로 서 있는 오래된 주택들을 보면서 이곳 사람들이 고단함을 느끼게 한다.

마을을 끼고 포구로 향하는 길에서 화북 진성을 만난다. 화북 진성은 조선 시대 때 제주도의 군사적 방어시설인 화북 진이 설치되었던 자리이다. 진은 변방의 방어를 위하여 북변과 해안지대에 구축된 군사행정구역으로서, 조선 시대에 들어 왜구의 방어를 위하여 남방 연병에 많이 설치되었다. 조선 후기에 9진으로 정착되어 모든 진에 성이 축조되었다. 이들 가운데 하나가 화북 진이다. 화북 진성을 지나 화북포구 가운데로 작은 사당인 해신사가 경건하게 서 있다. 마치 작은 암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화북포구로 육지로 왕래하던 관리들이 여기에서 문안을 드리고 안전을 기원하기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해신사는 1820년경부터 유교식 해신을 모셔 해상안전을 기원하였다고 전한다. 그 후 화북 마을 어부와 해녀가 중심이 되어 점차 해상안전과 바다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방향으로 무속적인 해신당의 구실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현대에 들어서면서 마을의 안녕과 수복을 기원하는 유교식 마을제로 다시 회귀하였다.

화북동을 거닐다 보면 이곳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의 닮은 마을임을 느끼게 될 것이다. 정감 있는 작은 그 속에 슬픈 이야기도 전해오지만, 아름다움과 희망이 넘쳐났다. 척박한 자연환경을 이겨내고 변화시킨 이 아름다운 마을을 만든 선조들의 모습과 과거와 현재, 미래가 역동하는 마을이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