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침의 역사를 거치며 평화롭고 아름다운 마을로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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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침의 역사를 거치며 평화롭고 아름다운 마을로 발전
  • 한기완 기자
  • 승인 2019.11.04 09: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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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오래된 마을 이름만큼이나 큰 인물들이 많이 배출
바구니 형상을 하고 있다 하여  '바굼지 오름' 으로 불리었는데 삼별초군을 대파하였다는데 유래하여 파군봉이라 불리고 있다.
바구니 형상을 하고 있다 하여 '바굼지 오름' 으로 불리었는데 삼별초군을 대파하였다는데 유래하여 파군봉이라 불리고 있다.

800여 년 전 여몽 연합군과의 전쟁 소용돌이 속에서 시작된 하귀 1리는 많은 이야기가 전해오는 곳이다. 고려 시대 때 삼별초가 항파두리성의 전초기지와 군항지로 이용했다는 데서 연유했던 '군냉이'지명이 말해주듯 아름다운 자연 속에 우리의 삶과 역사가 켜켜이 쌓여있는 제주시 애월읍 하귀 1리를 돌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생활용수와 경작지 자원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연안 어장 환경이 좋아야 일반적으로 원시 농경사회에서 정착하는데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될 수 있다. 하귀1리는 이런 환경을 다 갖추고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를 거치며 지금까지 이어오는 마을이다.

일년내내 마르지 않는 샘물 '거스린 물' 모습.
일년내내 마르지 않는 샘물 '거스린 물' 모습.

하귀 1리 사무소에서 고수동 해안가를 따라 들어가면 일 년 내내 마르지 않는 샘물 '거스린 물'이 나온다. 한라산 저 먼 곳에서 발원한 물은 이곳 고수동 바위틈에서 세상에 나오고, 이 물은 곧 이 지역 사람들과의 생명수였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야 되는데 이 물은 산쪽으로 거슬러서 자연의 이치를 거스리듯 산쪽으로 흐른다는 의미의 '거스린물(거시린물)'이다. 긴 세월을 이 물은 이곳 사람들에게 마른입을 적저 주던 시절이 있었다. 이 물을 비롯한 주변의 많은 용천수를 중심으로 마을이 이루어졌다. 역사가 오래된 마을 이름만큼이나 이곳에서 큰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거스린 물을 돌아 나와 대 도로변 마을 입구에는 '고광림 박사 현양비'가 말해준다. 고광림 박사는 1920년 하귀1리 이곳에서 태어났다. 경성제국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1949년 미국으로 건너가 1954년 하버드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자신의 성공뿐만 아니라 6남매 자식을 둔 고광림 박사는 미국 사회에서도 부러워할 만큼 아이들을 세계적인 석학으로 성장시켰고 '덕이 재주를 앞서야 한다'라는 자식 교육의 철학을 갖고 미국의 주류사회에서 당당히 제주인의 기개를 펼칠 수 있는 인재로 키웠다.

'덕승재'는 재주가 아무리 뛰어나도 덕이 모자라면 그 재주는 자신의 개인 사욕에만 쓰이고 그러한 사회는 이기주의가 팽배할 수밖에 없겠지만, 재주뿐만 아니라 덕이 넘치는 사회는 관용과 배려하는 마음이 넘치는 문명의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덕목이기에 고 박사의 삶의 덕목이기도 한듯하다.

인성과 창의성을 고루 갖춘 고광림 박사뿐만 아니라 자식들의 미국 사회에서 한국인의 위상을 정립하고 부인인 전혜성 박사는 한미문화교류의 산실 역할을 하는 동암문화연구소 운영을 통한 한국 알리기에 앞장섰다.

고광림 박사 가족이 제주인으로서 세계 속의 북제주군을 빛내 현양비 건립 사진.
고광림 박사 가족이 제주인으로서 세계 속의 북제주군을 빛내 현양비 건립 사진.

그 공로를 인정하여 지난 2005년도에 고광림 박사 가족이 제주인으로서 세계 속의 북제주군을 빛낸 지역인재로 손색이 없다고 판단하여 현양비를 이곳에 건립했다.

현양비 앞으로 새롭게 신시가지가 형성되었다. 농촌 들녘이 도시화로 그 형태는 전혀 알 수가 없지만, 그 역사를 묵묵히 지켜 온 파군봉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이 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역사의 변곡점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하귀1리. 1227년 여몽 연합군의 주력부대를 맞아 치열한 혈전을 벌였던 삼별초 군이 최대 격전지가 파군봉이다. 오름 이름이 말해주듯이 원래는 덮어놓은 바구니 형상을 하고 있다 하여  '바굼지 오름' 오름으로 불리었는데 삼별초군을 대파하였다는데 유래하여 파군봉이라 불리고 있다.

파군봉은 조망이 매우 좋아 바다로 상륙하는 적을 감시할 수 있어 삼별초는 항파두리를 사수하기 위한 전략적인 위치에 있는 이곳에 진지를 구축하고 여몽 연합군과 대항하였지만, 힘으로 사수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삼별초가 폐망하기에 이르렀고 이곳에부터 본격적인 몽골 지배시대가 열렸다. 그 이후 이 지역은 일제 강점기 때는 도내에서 가장 많은 항일운동가를 배출했고, 4·3 사건 당시에도 엄청난 인명 피해와 재산피해를 봤던 대표적인 마을이 하귀 1리이다.

하귀리 주민들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영모원을 파군봉을 마주하는 애조로 남쪽에 조성하였다.

그곳에 그동안 한자리에 모시기 어려웠던 4·3사건 희생자의 신위를 한곳에 모심으로써 화해와 상생의 표본이 되고 있으며 주민 화합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삼별초가 파군봉에서 격파당한 이후 역사의 강은 유유히 흐르면서 많은 부침의 역사를 거치며 지금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마을로 발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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