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애족의 정신과 선비의 얼이 넘치는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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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애족의 정신과 선비의 얼이 넘치는 마을
  • 한기완 기자
  • 승인 2019.11.11 12: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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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과 평화의 소중함, 아름다운 제주도와 4·3 역사를 이해할 수 있다.
가시마을 4·3길 시작지점 사진.
가시마을 4·3길 시작지점 사진.

600년 전 가시리를 설촌한 분은 청주 한씨 '한천'이다. 1392년 한천이 제주에 유배 와서 이곳에 정착하였다. 그가 대제학을 지낸 학자라는 것이 알려져 이웃 마을 등에서 학문을 배우려는 이들이 가시리를 찾으면서 가시마을이 형성됐다.     

'제주도민이 겪은 통한의 역사 현장, 제주표선 가시마을 4·3길'가시리 사람들의 슬픈 역사를 가슴에 묻어두고 새롭게 변신하는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의 또 다른 풍경과 삶의 이야기가 있다.

가시리는 1948년 4·3 당시에는 약 360여 가호가 있을 정도로 큰 마을이었지만, 초토화 작전과 소개령으로 마을은 폐허가 되었다. 이 와중에 산으로 도피했다가 붙잡히거나 도피자 가족으로 선별된 사람들은 표선리 '한모살'과 '버들못'에서 군인들에 의해 집단 총살당했다.

이후 가시리는 본동을 중심으로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지만, '새가름', '종서물', 마을은 재건하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가시리 주민들은 4·3당시 제주도민이 겪은 통한의 역사 현장을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역사 교육현장으로 조성, 인권과 평화의 소중함, 아름다운 제주도와 4·3역사를 올바르게 인식하기 위해 역사의 현장 길, 가시마을 4·3길이 만들어졌다.

그 길을 따라 깊숙하게 마을로 들어가면 가시리의 4·3의 아픈 역사뿐만 아니라 아픈 역사를 딛고 일어선 희망의 가시리를 볼 수 있다.

풍요로운 계절에 가시리의 들녘은 분주하고도 평온한 풍경이다. 평화롭던 마을에도 지난 71년 전에는 총성과 포연에 모든 생명은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순박한 사람들을 향해 총을 일방적으로 겨누었으며 야생화의 꽃잎처럼 무수히 떨어져 나간 생명들. 4·3의 소용돌이로부터 가시마을 역시 비켜갈 수 없었다. 그 역사의 현장인 제주 표선 가시마을 4·3길에서 제주 사람들의 온갖 시련과 애환을 지켜낸 아픔을 느낄 수가 있다.

가시마을 4·3길은 4·3센터가 있는 마을 복지센터가 있는 곳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길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하면 4·3의 아픔을 지켜보며 지금까지 푸름을 간직한 팽나무 사이로 자연사랑 미술관이 눈에 들어온다. 폐교한 가시초등학교에 마련된 사진작가 서재철의 작품을 전시한 곳이다. 한라산을 비롯한 제주의 자연과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담은 사진 작품들이 서재철 작가가 1968년 처음 카메라에 입문한 이래 연대별로 작품을 전시하여 70년대 이후의 급속한  제주의 변화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추억의 장소이기도 하다.

자연사랑 미술관 뒤로 난 길을 따라 빨강과 흰 리본으로 만든 4·3길 상징 띠의 안내를 받으며 올라가면 4·3 당시 마을 청년들이 보초(빗개)를 서던 장소인 고야동산에 이른다. 1948년 11월 15일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으로 마을이 불태워졌고 30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지금은 도로 확장공사로 모습이 변하긴 했지만, 동산의 형태는 아직도 그 당시 모습 그대로이다.

가시리 설촌한 청주 한씨 '한천' 묘.
가시리 설촌한 청주 한씨 '한천' 묘.

길은 다시 내리막길로 이어지며 제주에 선비의 얼을 심은 고려 유신 한천의 방묘를 만나게 된다. 제주는 불모의 척박한 절해고도라 해서 죄 있는 자 귀양 터가 되어 버려진 곳이었다. 이곳에 한 임금을 섬기는 충정으로 유배에서 풀리고도 제주에 정착하여 관직을 주어도 마다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써 불모의 땅 제주에 애국애족의 정신과 선비의 얼을 심어준 분이 바로 600년 전에 이곳에 정착한 한천이었다.

면암 최익현 지은 비문 '서재한공유허비' 전경.
면암 최익현 지은 비문 '서재한공유허비' 전경.

한천이 살았던 가시리에는 청주한씨 제주도 문중회가 건립한 '서재공재각'과 '전사당'이 있으며 경내가 잘 정비되고 성역화되어 있다. 그 가운데 주목을 끌게 하는 것은 '서재한공유허비'다. 그 비문을 지은이가 면암 최익현으로 되어 있어 더욱 관심을 끌고 있다.

특히, 한천 방묘는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고 있고 보존 상태가 양호하여, 제주도의 묘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인정되어 문화제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60-2호로 지정되어있다.

4·3길은 구석물당을 지난 면암 최익현 선생 유적비를 돌고 아래쪽으로 발길이 이어지니 주민들이 보초 섰던 마두릿 동산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종서물, 새가름, 가시천, 갑선이오름에서  '흙붉은 동산'이라고도 불리는 달래이모루에 길은 멈춘다. 이곳에서 1948년 11월 15일 가시리 주민 12명이 희생되고 마을 소개 명령으로 남아 있는 사람들은 해안이나 주변 산으로 피신처를 선택해야만 했다.

가시리의 4·3길은 곧게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마치 막히는 듯하고 물이 흐르듯 600년을 묵묵히 걸어온 세월 속에 환희보다는 아픔이 더한 마을. 가시리는 넉넉한 풍경이 말해주듯 해원과 상생의 소중한 가치를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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