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자는 인후(仁厚)한 곳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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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자는 인후(仁厚)한 곳을 찾는다
  • 한기완 기자
  • 승인 2019.12.30 14: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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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막기 위한 동백 씨앗이 동백 숲을 이룬 마을
위미리 상징, 동백나무 숲에 수령이 오래된 300여 그루 토종 동백 군락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
위미리 상징, 동백나무 숲에 수령이 오래된 300여 그루 토종 동백 군락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

1바쁜 일상을 잠시 미뤄두고 삶의 활력을 찾기 위해 사람들은 여행을 떠난다. 무더운 날 시원한 물 한 모금이 목마름을 달래주듯 여행은 열심히 달리는 우리의 인생길에 삶의 오아시스일 것이다. 일상을 떠난 길 위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그런 공간에서 의외의 어떤 장소, 의외의 시설들이, 이외의 사람들과 만났을 때 경이로울 뿐만 아니라 의지와 자극이 되어준다.   

삶의 쉼표를 찾아 제주를 찾은 사람들과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로 향했다.

제주에서 위미리 하면 떠오르는 것은 감귤일 것이다. 따뜻한 기후와 토질은 최고의 감귤을 키우기에는 최적지이기에 이곳에서 생산하는 감귤은 최상의 상품으로 인정받아 농가 소득이 우리나라 다른 농촌 지역에 비해 높다. 감귤원의 풍요로움이 이곳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투박하게 보이지만, 삶의 여유가 묻어난다. 그리고 제주가 1500만 명의 관광 시대가 열린 이후에 제주는 가족 단위의 관광객들이 눈에 띄게 많다. 그런지 위미리에도 많은 관광객이 북새통을 이룬다. 특히 남원에서 쇠소깍까지 이어지는 올레 5코스에는 제주의 해안 절경과 감귤원의 한데 어울린 장관은 이곳을 방문한 관광객이 마음을 하나로 묶는다.

위미2리 마을 입구 사진.
위미2리 마을 입구 사진.

위미리는 마을 북쪽의 동산들이 마치 소가 누운 형상이고 쇠동산은 소의 꼬리와 흡사하다고 하여 자연부락의 명칭으로서 풍수지리설에 의한 지명이었다고 한다. 1416년(조선 태종 16)에 지방행정국역과 제도가 개편되면서 우미(又尾)를 우미(又美)로 개칭하였다. 우미리에서 위미리로 개칭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15년 '제주도제'가 실시되면서부터 라고 한다. 특히 '위미'라는 말은 '논어'에서 나오는데 공자께서 자기가 살 곳을 선택하는 데 있어 지혜로운 자는 인후(仁厚)한 곳을 찾는다는데 연유하여 이곳 조상들은 넉넉한 인심과 미풍양속이 가득한 아름다운 마을을 꿈꾸며 '위미리(爲美里)'로 정했을 것으로 보인다.

위미리는 한라산 남쪽에 위치하여 지역적인 영향으로 기온은 따뜻하여 식물성장이 연중 가능하여 고품질의 감귤을 생산하고 있다. 최근에는 비닐하우스 등으로 최소한의 자연적 제약마저 극복함으로써 연중 노지재배가 안 되는 작물이라도 재배가 가능하게 되었다. 해양성 기후 탓으로 바다에서 불어오는 폭풍 탓으로 해일과 높은 파도를 동반하는 까닭에 해안 침식과 농작물에 막대한 피해를 받을 때가 많다.

여정의 출발점은 위미리 상징, 동백나무 숲에서 시작된다. 어른이 두 팔을 벌려도 못 안을 만큼 수령이 오래된 300여 그루 토종 동백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 숲은 한 할머니의 정성으로 만들어진 숲이라고 한다. 이곳 사람들은 그 할머니를 '동박낭 할망'이라고 불렀고, 이 숲은 1982년 제주기념물(39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130여 년 전 위미리 현맹춘 여성(1858~1933)은 제주도의 모진 바람을 막기 위해 한라산의 동백 씨앗을 따다 이곳에 심기 시작했다. 동백 씨앗 한 알 심고, 돌 한 덩어리는 담을 쌓으며 그녀의 동백 숲 가꾸기는 평생에 걸쳐 이뤄졌다. 나무가 자라면서 거친 황무지는 기름진 땅으로 바뀌었고 동백나무는 울창한 숲이 되었다. 12월에 피기 시작한 동백꽃은 다음 해 4월까지 이어진다. 그렇기에 위미의 아름다운 동백꽃을 감상하기에는 겨울에 찾는 것이 제일 좋을 듯싶다.

특히 동백꽃은 강요배 화가에 위해 4·3의 상징 꽃이 되었다. 이는 토벌대들에게 눈밭에 떨어진 붉은 동백꽃 모습처럼 4·3 때 피를 흘리며 죽어간 희생자의 모습과 닮아, 그 모습을 그림으로 형상화하여 작품으로 출품하는 데서부터 비롯됐다.

마을에서 희생된 6·25참전 용사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만든 비석.
마을에서 희생된 6·25참전 용사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만든 비석.

위미항에 들어서면 특이한 큰 바위가 한라산을 향해 서 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신성시할 정도 이름난 조배머들 코지이다. 일본 강점기 때 이 마을 세도가가 자신의 집안이 이 바위 때문에 집안에 흉사가 있을 것이라는 점쟁이 말을 듣고 일본인의 도움을 받아 화약으로 깨뜨려 버렸다. 그런데 깨어지는 순간 바위틈에서 붉은 피가 솟아 나오면서 바위는 무너져버렸다. 이 바위는 마을 사람들의 장수와 출세를 보장하는 수호 석이었다는 사실을 다른 점쟁이로부터 나중에 알았다. 그 후 1990년대 중반에 들어 마을 청년회가 중심이 되어 조배머들 바위를 다시 원형에 가깝게 복원을 해놓았다. 위미항에서 비룡모양으로 웅장하게 한라산을 웅시하는 조배머들 코지에서 위미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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