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시작은 신구간(新舊間)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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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시작은 신구간(新舊間)부터
  • 한기완 기자
  • 승인 2020.02.01 10: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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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大寒) 후 5일째부터 입춘(立春) 3일 전 일주일 동안
제주도 풍습인 신구간 기간을 맞아 이삿짐을 옮기고 있는 모습.

"이젠 제주에도 신구간(新舊間) 특수는 어수다" 가전제품 판매상이나 가구점 주인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다. 제주 시내 거리에는 대한이 가까워져 오면 가전제품 판매점이나 가구점 등 '신구간 세일'이라는 현수막이 온통 길거리를 도배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진풍경이고 이때가 이사와 관련된 업종이 대목을 맞는다. 부동산 사무실과 사람이 왕래가 잦은 전봇대나 벽에는 임대할 방이 있다고 선전 쪽지가 다닥다닥 붙어있다.

그러나 올해 신구간 경기는 상인들에게도 별로 재미가 없듯이 제주의 이사 풍속도가 많이 변했다.

예전에는 이사 철인 대한(大寒) 후 5일째부터 입춘(立春) 3일 전 일주일 동안 이어지는 신구간에는 약 5000에서 1만가구가 이사했다. 이는 제주도민의 약 15% 정도라 할 만큼 많은 숫자였다. 이 시기가 신관과 구관이 교체되는 기간을 말한다. 신구간에는 제주의 목사가 업무를 마무리하고 떠나는 이임 목사와 새로 부임하는 목사가 이 기간에 이·부임을 했다. 이어 신임 목사는
한라산 백록담에서 국태민안을 위한 한라산 산신재를 지내는 것이 업무의 첫 시작이다.

아라동 역사문화탐방로에는 산천단이 있다. 이곳은 조선 시대 때 신구 간에 제주로 새로 부임하는 목사가 국태민안을 기원하기 위해 조성된 재단이다. 그 이전에는 한라산 백록담에서 제를 지냈다. 가장 추운 한겨울에 백록담까지 제를 지내기 위해 올랐던 사람들은 눈 때문에 사고사가 많았다. 1470년에 새로 부임한 이약동 목사는 이런 사실을 알자 백록담처럼 영험한 기운이 있는 산천단을 찾아내어 제단을 마련하고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는 산천단이 신구간의 원조라고 할 수 있듯이 제주의 고유 민속신앙의 전통이 이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신구간에는 무슨 일을 해도 아무런 동티(탈)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가옥수리나 이사 등 마음 놓고 일하여도 아무 탈 없이 할 수 있는 기간이다. 이 기간은 백만제신이 천상에 올라가 있는 기간이니 천상에서는 인간만사중의 선행 악업에 관하여 보고를 받고 휴식을 하는 기간이고 지상에는 귀신이 없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이틈을 타서 집안의 모든 일, 가옥 울타리, 부엌, 변소, 외양간 등을 손질할 곳은 으레 택일하지 않고도 거치장한 일들을 하게 마련이다. 더욱이 이사만큼은 반드시 신구간에 해야 한다. 이때가 이사 기간이라서 막혀서 갈 수 없는 방위마저도 볼 필요가 없을 정도이기에 제주의 길거리는 이삿짐으로 붐빈다.

이사할 때도 차례가 따른다. 먼저 집안의 가장이 화로에 숯불을 피워서 앞서게 하고, 그 뒤를 도끼를 들거나 솥에 화곽(성냥)을 넣은 사람이 따른다. 이사할 집에 가면 현관에 도끼를 세워 두는데 이렇게 해야 이사할 집에 재앙이 닥치지 않는다. 어린이들이 밖에 돌아다닐 때도 성냥을 주머니에 넣어 다니게 하고 심지어는 마늘을 주머니에 넣어주기도 한다. 이것들은 사특한 것을 방지하기 위한 제주 사람들의 믿음이 스며있다. 이사할 때에는 빗자루질을 못 하게 하는 것이 특이하다. 요즘은 이사할 때는 반드시 살던 집을 처음 들어갈 때처럼 깨끗이 치워놓고 떠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예전에는 살던 짐만 고스란히 빼고 갔었다. 이는 새로 이사를 오는 사람들에게 불운을 준다고 여기기 때문이기도 하고 집주인 입장에서는 집안의 좋은 복을 쓸어간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렇게 제주 사람들은 모든 신이 천상세계로 오가고 또 그 신들이 많은 일거리를 처리하노라고 인간세계를 보살필 겨를이 없는 분망한 틈을 타서 사람들은 예로부터 그러한 신들의 눈을 피해 가면서 쓰러져가는 가옥을 다시 고쳐 세우고 도한 새로운 살림살이를 꾸며온 것이다.

제주도민들이 가장 추운 겨울철에 이사하는 이유도 있다. 이는 농경사회의 특성과 계절과도 관련이 있다. 농경사회에서는 새로운 일 년이 시작되는 중요한 시기일 뿐만 아니라 농한기이고 날씨가 너무 추워서 세균 번식이 정지되는 5℃ 이하가 유지되는 기간이다.

이때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제주 사람들의 과학적이고 효율적인 삶의 지혜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일손이 한가할 때 집수리도 하고 이사도 해야 바쁜 농사철에 농사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신구간 풍습이 많이 사라지고 있다고 하지만, 도심 곳곳에는 아직도 이사 차량 행렬이 지나가는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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