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변하는 시대 잠깐의 여유, 푸근한 인심이 넘치는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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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변하는 시대 잠깐의 여유, 푸근한 인심이 넘치는 마을
  • 한기완 기자
  • 승인 2020.06.07 14: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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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한…역사 속 인물·문화재 간직
예전 그 정취 그대로 남아 그윽함을 뿜어내고 있는 신례리 마을 풍경 모습.
예전 그 정취 그대로 남아 그윽함을 뿜어내고 있는 신례리 마을 풍경 모습.

이름난 마을은 하나같이 역사 속에 잘 알려진 큰 인물이나 수많은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 그런 것과 걸맞게 남원읍 신례 1리는 청동기 시대의 유적에서부터 근·현대에 이르며 찾아낸 신례리 왕벚나무 자생지, 그리고 유명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한 마을이다.  

요즘 제주 시골 마을 어디를 가보면 개발붐에 힘입어 예전 그 모습이 많이 사라지고 있는 가운데 유독 남원읍 신례리는 예전 그 정취 그대로 남아 그윽함을 뿜어내고 있다. 세월의 덮게 만큼이나 정이 두텁고 마을 사람들의 정성스레 가꾼 마을의 풍경이 운치를 더한다.

오른쪽 사진 양성근 남원읍 신례1리장.

과거보다 미래가 더 기대되는 마을, 아름다우면서 독특한 멋을 풍기는 곳, 남원읍 신례1리(이장 양성근)를 찾았다. 

신례리의 옛 이름은 예촌이다. 고려 시대에 마을이 형성돼 호아촌(狐兒村) 또는 호촌(狐村)이라 불리다가 '예촌'이 되었다. 이곳은 예로부터 예(禮)를 존중하는 전통이 이어지고 있어 19세기 중반에 호(狐)를 예(禮)로 고쳐 예촌(禮村), 곧 '예를 존중하는 마을'이라는 뜻이 되었다. 신례리(新禮里)라는 이름은 1905년에 새로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2006년 제주특별자치도가 출범하면서 남제주군이 서귀포시에 통합되어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 신례리가 되었다. 자연마을로 역원동·부전동·만지동·사가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신례1리의 넓은 중산간 지대 초지는 축산과 감귤 산업의 기반으로 소득원을 이룬다.

신례리의 설촌은 1000여 년 전 고려 태조 때부터 입으로 전해오지만, 이곳에는 그보다 훨씬 이전인 청동기 시대 때부터 사람들이 살았었다.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 무덤인 신례리 지석묘 1호(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2-25호)와 신례리 지석묘 2호(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2-26호)가 이를 증명하고 있듯이 예로부터 신례리는 들이 넓고 농산물이 풍부해 살기 좋은 땅에 터전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가 원산지인 왕벚나무는 제주도와 전라북도 대둔산에서만 자생하는데 제주시에서 서귀포로 가는 5·16도로 길목 산자락 신례리 관내에 자리하고 있다. 왕벚나무는 우리나라가 원산지로서 그 수가 매우 적은 희귀종이므로 생물학적 가치가 높고 식물지리학적 연구 가치가 높은 나무다. 

예를 숭상한다는 마을 이름이 말해주듯 이곳에는 또 하나의 문화재가 있다. 양금석 씨 제주 전통가옥이 그것이다. 1930년대에 지은 이 마을 양 씨 종가댁이다. 600여 평의 대지 한가운데 안채는 한라산을 등지고 있고, 맞은편 바깥채, 그 사이 동북쪽에 모커리(모로 앉은 집)가 있다.  

마을 큰길에서 집으로 들어가는 올레는 약 50m이나 될 정도로 매우 길고 S로 휘어져 있고 제주의 전통적인 부잣집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예전에는 제주에서는 주택을 마련할 때는 큰길에서 가장 먼 골목 끝이 가장 좋은 자리라고 생각했다. 이는 큰 길에 돌아다니는 나쁜 귀신이 들어오지 못하기 위함도 있고 조용한 가운데 자신들만의 편안함을 찾기 위한 이유도 있다고 한다.  

이처럼 신례리에는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져 있는 비지정 문화재가 즐비하다. 조선 시대 제주목 지역에는 10개의 국마장중에 하나인 9 소장이 신례리 중산간 지역에 설치 운영되었다. 목마장의 경계에 쌓은 담장인 신례리 잣성이 이곳이 제주의 목축의 주산지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목축유산이다. '잣'이란 성(城)을 의미하는 제주어다. 이처럼 신례리에는 국유지와 사유지를 구분하기 위해 쌓은 '신례리 구분담'과 이승악과 신례천 주변에 폐기된 숯가마 터가 14기가 분포할 정도로 문화유적이 많이 보유하고 있다.

변화가 빠른 제주의 마을에서 유난히 변화가 더딘 마을. 신례리는 일본인 관리들도 머리 숙여 감탄했을 정도로 행정 수완이 뛰어났던 양인석 서중면 초대면장을 비롯하여 4·3 사건이 평정된 후 면민의 생명, 재산을 보호하고 면 행정 발전에 힘썼던 양기형 면장, 그리고 양을 변호사와 양상익 교수 등의 유명한 인물을 배출했듯이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의 정체성을 살리고 선조들의 기상을 지켜 나아 가려는 마음이 넘치고 있는 곳이다.

신례1리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얼마나 소중한지, 유행도, 사랑도 빨리 변하는 시대에 잠깐의 여유, 푸근한 인심을 느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이 넘치는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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