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지석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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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 지석묘
  • 한기완 기자
  • 승인 2020.10.16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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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에는 제주시 용담 2동 2624-1번지에서 건축허가에 따른 구제 발굴했던 현장.
2011년에는 제주시 용담 2동 2624-1번지에서 건축허가에 따른 구제 발굴했던 현장.

태초의 제주가 고인돌이 만들어지기까지

제주시외버스터미널 서쪽에 동산교가 있다. 그곳에서 한라산 아래쪽인 속칭 먹돌세기 일대가 제주 선사 문화 유적지로 고대마을 유적과 함께 고인돌이 밀집해 있다.

최초의 제주는 섬이 아닌 아시아에서 가장자리에 위치한 대륙이었다. 빙하기와 간빙기를 번갈아 일어나면서 제주는 평야 지대와 대륙붕의 지대를 반복하다가 약 180만 년 전까지 이어져 왔다. 그 후 50만 년 전부터 화산활동이 계속되면서 5천여 년 전 마지막 화산폭발로 성산 일출봉과 송악산이 만들어져 마침내 오늘날 제주 섬의 모습이 되었다. 고산리 유적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제주에도 구석기인들이 본격적으로 거주하면서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로 이어지면서 많은 선사시대 유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제주도 고인돌은 한반도에서 분포하는 탁자식·바둑판식·개석식이 모두 존재한다. 특히 한반도에서 기원전 300년경 이미 사라진 지상형 북방식이 기원후 200년까지 잔존하는 양상을 띤다. 탐라형성기 말기 제주도 지상형 고인돌은 상석 아래 판석형 지석을 병풍처럼 괴고 지상에 위석형 돌방을 만든 형태로 축조되기에 이른다. 이 형태는 한반도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수한 고인돌로, 이른바 '제주도식 고인돌'이라 한다. 

제주시 용담2동 2624-1 번지 용담지석묘 사적 제522호.
제주시 용담2동 2704-1 용담지석묘 사적 제522호.
제주대학교 부설 제주사대부고 내 위치한 용담지석묘.
제주대학교 부설 제주사대부고 내 위치한 용담지석묘.

용담동 지석묘의 특징

지난 2011년에는 제주시 용담 2동 2624-1번지에서 건축 허가에 따른 구제 발굴 과정에서 움집터 29동, 굴립주 건물지 3동, 불다짐 소성유구 3기, 우물(집 수장) 4기, 수혈 유구 58기 등이 확인된 선사시대 유적지가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그 주변으로 사적 제522호로 지정된 용담 지석묘군인 고인돌이 있다. 돌배라는 전설이 깃들어 있는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부터 만들어졌던 사람의 무덤 양식인 지석묘는 ‘고인돌’과 ‘돌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고인돌은 외부 모양은 시신을 안치하도록 판자 모양의 돌을 사용하여 석실을 만들고 그 위에 큰 돌을 올려 완성했다. 제주특별자치도에는 150여 기의 지석묘가 분포하고 있다. 그중에 제주시 용담동에 있는 선사 유적지와 몇 기의 지석묘를 통해 선사시대 제주의 모습을 짐작할 수가 있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선사시대의 돌무덤인 고인돌은 우리나라가 고인돌제국이라고 말할 만큼 세계에서 가장 많다. 한반도에서는 전남지역에 가장 많은 2만 여기가 분포하고 있으며 제주지역에서 확인된 지석묘도 대략 150여 기 정도로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도 제주시 외도동과 애월읍 광령리, 그리고 용담동 주변에 가장 많이 분포하고 있다. 이들 지석묘는 한반도 본토와는 달리 축조 시기가 늦고 형태도 특이하며 재료도 모두 현무암을 사용하고 있다.

문화교류 또는 이동이 중심지였던 제주

세계 어디든지 그렇듯이 그 지역의 땅과 기후가 문화를 만들고, 옛날부터 사람들이 살아오면서 신이나 초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삶의 지혜로 승화시켜 전래하여 온 것이 신화이다.

삼성혈은 고·양·부 씨의 시조가 솟아난 3개의 구멍을 말한다. 이 구멍에 솟아난 3 시조들은 다섯 곡식의 씨와 송아지·망아지를 가지고 성산 온평리로 온 벽랑국의 세 공주와 각각 결혼하여 농경 생활을 시작하였다는 신화가 전해온다. 여기에 온 세 공주의 나라 벽랑국은 아마도 인도인일 수도 있을 듯하다. 그들은 인도에서 시작되는 해류를 따라 제주에 왔고 그들의 후예들은 인도까지 교류하면서 제주의 건국 신화가 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제주 신화를 통해 유추해석으로 알 수 있듯이 지석묘는 한반도에서 제주를 거쳐 일본 규수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제주가 사면의 바다로서 서해와 대한해협 쪽으로 해류가 갈라지는 지역이다. 이 해류는 제주 남쪽 해협으로 올라와서 중국의 랴오둥반도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중국 연안을 따라 쿠로시오 쪽으로 흐른다. 해류는 뱃길로 이용했기 때문에 중국과 일본, 멀리는 인도까지도 연결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선사시대부터 근세의 이르기까지 문화교류 또는 이동이 중심지가 제주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다.

제주 사람들은 천 년 훨씬 이전부터 한반도와 중국을 마음대로 넘나들며 동북아 중심지로서의 해상제국의 위치는 대단했을 것으로 보인다.

탐라 역사를 알 수 있는 제주의 지석묘를 통해 우리 선조들은 한라산의 품 안에 삶의 보금자리를 마련하여 개척의 정신으로 바람 부는 땅과 바다를 갈고 씨 뿌려 가꾸면서, 제주만이 독특한 문화를 만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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