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와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공존하고 있는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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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와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공존하고 있는 마을
  • 한기완 기자
  • 승인 2020.02.23 18: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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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적인 시설농업을 일찍이 들여와 농가 소득 향상
원당봉 정상에서 본 해안촌락으로 '진드르' 평야와 함께 신촌리 마을 전경이 보인다.
원당봉 정상에서 본 해안촌락으로 '진드르' 평야와 함께 신촌리 마을 전경이 보인다.

천년의 세월 동안 이어온 신촌리. 해안과 접해 있는 마을 깊숙이 들어가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제주의 옛 모습이 그대로 많이 남아있는 신촌리는 바다의 푸름과 넓은 들판이 아름다운 자연환경 속에 제주 사람들이 삶과 역사가 켜켜이 쌓여있다.

고려 시대에 이미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 중 하나로 지정되어 신촌현(新村縣)이라 불리며 주변 마을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했던 조천 신촌리는 예사롭지가 않다.

신촌리의 시작은 원래 현재 '웃마실'의 속칭 '숙군' 일대에 마을을 이루고 살다가 주민들이 식수를 찾아 좀 더 아래의 해안가 속칭 '큰물' 주변, 해안 포구에 거주했다. 물을 찾아 해변으로 내려온 것이 지금의 신촌리 자리인데, 이때 새로이 생긴 마을이라는 의미로 '신촌리'라고 불리게 되었다.

천 년 전부터 터를 잡은 신촌리는 해발 100m 이하의 지대에 자리한 해안촌락이다. 서쪽은 원당봉을 사이에 두고 넓고도 길게 뻗은 '진드르' 평야에 서면 주변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제주에는 넓은 평야지대가 드물지만, '긴 들판'이라는 의미의 '진드르' 일주도로를 따라 이어진다. 길 주변으로 펼쳐진 원당봉을 시작으로 초록의 들판을 따라 어우러져 그야말로 절경이다.

진드르에는 일제 강점기 시대에는 제국주의자들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 이곳에 비행장을 만들려고 터를 닦았던 곳이다. 동쪽으로 삼양을 지나 원당봉 기슭부터 신촌마을까지 일직선상으로 곧게 벋은 진드르 일주도로 변은 일제 강점기 때 잔재가 남아 있는 비행장 활주로의 흔적이다. 지금은 4차선 확장과 여러 갈래의 새로운 길이 놓이면서 그때 그 모습은 많이 소실되어 역사의 아픈 상처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진드르를 지나 신촌에서 유명한 자연생태 습지 남생이 못으로 이동하자 그 주변도 많이 변했다. 감귤 과수원과 수박, 참외밭 등이 대부분이었던 곳은 대부분 사라지고 타운하우스와 카페가 새로운 풍경을 만들었다.

어린 연꽃 등 수생식물로 자라는 습지로 아이들의 생태학습장인 남생인 못 사진.
어린 연꽃 등 수생식물로 자라는 습지로 아이들의 생태학습장인 남생인 못 사진.

아시아실잠자리, 밀잠자리 등 수생 곤충과 참개구리, 왕우렁이 등 새들의 먹이 자원이 풍부한 남생이 못은 갈대와 어린 연꽃 등 수생식물이 자라는 습지로, 아이들의 생태학습장으로 이용하고 있다. 왜가리, 쇠백로, 흰날개해오라기, 흰뺨검둥오리, 물총새, 쇠물닭 등 이동성 철새들이 잠시 이곳에 들러 먹이를 찾아 사냥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할 때가  있다. 이뿐만 아니라 주변의 농경지, 수로, 해송림에서는 바다직박구리, 찌르레기, 참새, 직박구리, 섬휘파람새, 멧비둘기 등 제주 텃새들도 흔히 관찰되는 곳이다. 남생이 못은 작지만, 수많은 동식물의 서식 하고 있다. 천년을 이어왔을 남생이못은 주변 개발로 인해 이곳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작고 큰 생명체들이 위협을 느끼는 것 같아 아쉬움이 더한다. 이 주변을 보호하여 사람과 뭇 생명과 인간이 함께 오래도록 공존하기를 바랄 뿐이다. 

조천 신촌리는 토질이 비옥하고 적당한 강수량과 함께 예로부터 제주시와 인접한 입지적 유리함을 이용하여 근교농업이 발달했다. 여름에는 수박과 참외, 겨울에는 감귤과 배추 등 채소 등의 주산지로써 특용작물 재배의 선구적인 역할을 해왔다. 특히, 선진적인 시설농업을 일찍이 들여와 농가 소득을 향상시키는데 원천이 되었다.

신촌리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마을 안 모습.
신촌리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마을 안 모습.

신촌리는 마을 전체가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 불리면 좋을 듯 많은 자연유산과 유적이 많다. 그중에 신촌향사를 빼놓을 수가 없다.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 후기에 마을에 공무를 처리하던 곳으로 전국적으로 이런 용도의 건물이 남아 있는 것은 몇 안 된다고 한다. 제주의 일반민가와 비교하면 구조방식이나 간살나누기 등은 거의 비슷하지만, 정면 7칸으로 규모가 훨씬 크고 대청이 특히 넓다. 언제 처음 설치됐는지는 분명치 않다. 또한 이곳에는 조군현 가옥, 비석군, 도대불, 방사탑 등이 남아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 이 마을을 중심으로 현 삼양동의 동쪽과 함덕리 서쪽 사이에 자리 잡았던 마을을 묶어 신촌현으로 편재했을 만큼 큰 마을이었음을 짐작된다.

제주의 마을은 겉보기와 다르게 그 안으로 깊숙이 들어서면 설수록 그 나름의 이야깃거리와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공존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제주에서의 마을 여행은 또 다른 묘미를 만끽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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