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첩칠봉에 탑을 세워 소원 이룬 기황후 이야기가 있는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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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첩칠봉에 탑을 세워 소원 이룬 기황후 이야기가 있는 마을
  • 한기완 기자
  • 승인 2020.09.11 14: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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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만들고 가진 것을 나누려는 사람들이 사는 곳
3개의 능선에 7개의 봉우리로 이어져 있는 삼양1동의 삶의 안식처 원당봉 모습.
3개의 능선에 7개의 봉우리로 이어져 있는 삼양1동의 삶의 안식처 원당봉 모습.

학창 시절 임해 훈련지로 유명했던 검은 모래 삼양해수욕장이 있는 제주시 삼양1동. 기원전 150년에서 기원 50년에 이르는 청동기시대 선사 유적지가 잘 보존된 삼양1동은 바다와 원당봉을 삶의 안식처로 기대며 사람들이 살고 있다.

원당봉에 있는 오층석탑 모습.
원당봉에 있는 오층석탑 모습.

제주시 동쪽으로 가다 보면 연꽃처럼 피어오른 원당봉이 있다. 고려 시대 때 이 산 중턱에 원나라의 당(신을 모시고 굿을 하며 제사를 모시는 곳)인 원당이 있었음에 원당봉이라 유래가 되었다. 이 오름은 3개의 능선에 7개의 봉우리로 이어져 있다. 고려 충렬왕 때 원나라 기황후가 태자가 없어 북두칠성의 명맥이 비친 삼첩칠봉에 탑을 세워 불공을 드려야 한다는 한 승려의 비방을 받아 이곳 제주까지 내려와 삼첩칠봉을 찾아낸 곳이, 바로 원당봉이다. 기황후는 주봉에 오층석탑을 건립하고 불공을 드린 후 태자를 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듯 예사롭지가 않은 마을임을 직감할 수 있다.

검은모래 해변으로 유명한 삼양동의 자랑거리 '삼양해수욕장'의 모습.
검은모래 해변으로 유명한 삼양동의 자랑거리 '삼양해수욕장'의 모습.

삼양 해안도로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삼양해수욕장과 삼양 화력발전소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반긴다. 도로변을 기준으로 서쪽은 초가 형태의 어촌마을 특유의 작은집들은 사라지고, 현대식 건축물로 바둑판 위에 돌을 얹힌 듯 가지런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면서 빠른 도시화의 소용돌이 속에 살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제주시민들의 상수원인 삼양동 해안 용천수 모습.
제주시민들의 상수원인 삼양동 해안 용천수 모습.

삼양동은 예로부터 식수원이 풍부했다. 삼양동 해안 용천수는 제주시민들의 상수원으로 사용하고 있을 정도로 물이 깨끗한 지역으로 유명하다. 삼양동의 자랑거리인 '삼양해수욕장'은 다른 지역과는 달리 검은 모래 사장이 끝없이 펼쳐져 있어 모래 뜸질하기 위해 멀리 일본에서도 찾아올 정도로 유명한 검은모래 해변과 삼양의 또 다른 자랑거리가 즐비하게 있다. 특히 이곳은 해양레포츠로 메카로 주목을 받고 있을 정도로 윈드서핑을 즐기러 전국에서 모여드는 곳이다.

기원전 1세기를 전후한 대단위 복합유적지로 밝혀진 '삼양동 선사유적지'는 도심 속의 사적공원으로 조성되어 시민과 관광객들에게 '탐라'의 모습을 생생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제주의 선사 문화 유적지가 말해주듯 삼양동은 유서 깊은 동네임을 증명하고 있다.

고려 충령왕 26년(1300년) 동서도현령 설치령에 따라 제주시 중심지를 중심으로 동도에는 신촌, 함덕, 김녕 등이 서도에는 귀일, 고내, 애월, 곽지 등 12개 도현의 말단지방 행정구역 단위가 설치되었다. 그때 원당봉 서북쪽 밑에 봉수취락이 형성되었다. 삼양1동에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모여 살기 시작한 때는 조선건국과 더불어 고려유민들이 유배되고 또는 은둔할 목적으로 제주도에 입도하여 살기 시작할 때 이루어졌다고 짐작된다. 조선 명종 16년(1561) 경주 김씨가 이곳에 자리를 잡으면서부터 명조에서 숙종 때에(1561~1700년대) 비로소 오늘과 같은 자연마을이 이루어졌다.

"제주 사람들은 오름에서 태어나서 오름으로 돌아간다"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원당봉은 7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주봉에는 현대에 이르러 자기 토지에 조상을 모신 몇몇 무덤은 보이지만, 오래된 무덤은 없다.

흔히들 절터를 선택할 때 풍수적으로 비보의 개념이 강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풍수에서 비보란 지역적으로 좋지 않은 장소에 특정건물이나 돌, 나무 등을 이용하거나 절을 세운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또한 국가의 최고의 대사를 기원할 때나, 적멸보궁 등 부처님의 진신사리 등의 중요한 양택의 입장에서 모셔야 하는 논리에 의해 최고 명당에 위치한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를 보면 원당봉은 이 두 가지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명당 터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삼양동일 때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비보의 개념으로 원당사를 창건했고, 이때 절 건립 시에는 지역주민들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삼양동은 예로부터 인재가 많이 배출하고 농사와 어업으로 풍요를 구가하면서 살았다고 전해오는 것은 이 원당봉을 의지하고 여기에서 정성을 다한 옛 조상들의 공덕이 지금까지 발복하는 것만 같다. 

원당봉과 검은 모래 해변에서 들어서면 사실 특별한 곳이 없을 것 같지만, 여기서는 많은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개발붐에 힘입어 많은 것이 한꺼번에 변화된 삼양 1동에는 지금까지 원당봉 아래 따뜻한 인심은 변하지 않고 날마다 행복을 만들고 가진 것을 나누려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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