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에 빼앗긴 어업권 회복위해 어민항쟁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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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빼앗긴 어업권 회복위해 어민항쟁 전개
  • 제주관광신문
  • 승인 2019.06.28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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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지역 고기잡이 어선들이 조업에 나서기에 앞서 항구에 정박해 있는 모습.
제주지역 고기잡이 어선들이 조업에 나서기에 앞서 항구에 정박해 있는 모습.

자리돔 어업 다음으로 활발하게 이루어 진 게 황돔·참돔·옥돔 채낚기어업, 오징어, 상어, 도미어업이다. 황돔·참돔·옥돔 채낚기어구를 만드는 방법은 긴 나무의 중앙에 납추를 달고 낚싯줄을 묶고 양쪽에 도래를 단다. 2~3자(1자:0.303m)의 면사 낚싯줄을 묶고, 낚시 끝에 구리로 만든 낚시비늘을 붙인다. 낚시대 중간에 60~120심(1심:1.8m) 정도의 감물을 들인 지름 2분 5리 정도의 면사를 사용한다. 터배를 타고 연안에서 1리(1리:3.9㎞) 이내의 장소인 수심 30~80심에서 조업을 한다.  조업시기는 2~3월 날씨좋은 날이 적격이다. 어획물은 주민에게 판다.

오징어잡이 어구는 길이 7~8촌(1촌:3.03㎝), 지름 5분(1분:0.15㎝)정도의 납을 둥글게 깎아 가는 낚싯줄과 낚시 바늘을 묶는다. 낚시 줄을 바다 속에  투승을 해서 오징어를 낚는다. 잡은 오징어는 건조해서 어포를 만든다. 1 파는 열개씩 묶은 오징어 포장 단위이다. 목포, 강경, 경성에 판다. 고종 29년(1892년) 히로시마 현 사람인 아라카와가 오징어잡이를 위해 어선 40척과 우두머리배 5척을 가져와 비양도를 근거지로 어업을 했다.

상어잡이 어업은 제주도 서쪽연안과 남쪽 연안에서 이루어 졌다. 큰 상어를 대상으로 할 때는 길이 8~10심, 넓이 1~2심, 그물 눈금은 9촌(27cm)와 작은 상어를 잡을 때는 길이 8~11심, 넓이 3~5자, 그물눈금 6촌(18cm)의 면사로 만든다. 어법은 노을 질 무렵에 연안에서 멀지 않은 6~7심의 암초와 사빈(모래)사이에 세 겹 또는 다섯 겹을 치고 부표를 설치하고 다음날 아침에 그물을 걷어 올리면 한 두 마리잡거나 못 잡을 때도 있다. 어기는 6월에서 12월까지이다. 

상어의 말린 지느러미는 중매인이 매입, 전량 일본에 수출한다. 생산량이 소량이어서 늘 고가이며, 흉상어 한 마리분의 지느러미는 1원 내외, 다른 종류의 지느러미는 7~8괘(掛)의 가격에 거래됐다. 상어 간은 기름을 짜고 그 기름은 제충용이나 점등용으로 사용했다. 고기는 식용으로 도민들이 소비를 했고, 가격은 큰 것 한 마리에 30~50전에 거래되고, 대형은 두 배의 가격이다. 가을에는 상어어묵을 만든다. 상어어묵은 길이 1척 5촌, 1촌 5분의 시각형으로 자르고 소금에 절인 후 나중에 햇볕에 5일 정도 말린 것으로 전량 일본으로 팔려나간다. 상어잡이 어선 한 척에 어획량은 700~1,000원 정도이다.

고종18년(1882년)에 오이타현 사람인 마츠카와가 어선 10척을 가져와 비양도에서 조업을 시작했고 이어서 오이타 현, 야마구치 현에서 온 어선은 20여 척이나 됐다. 일본인들이 제주를 근거지로 상어잡이를 시작해 많을 때는 60척에 달했다고 한다. 상어어업 조직은 물주가 출어 준비하고 어획물 전매권을 갖고 시세보다 5리~1전 저렴한 가격으로 매입한다. 이때부터 일본인이 제주 연근해에서의 어업침탈의 시작이라고 본다.

도미 잡이 어업은 1900년도에는 제주도에서 연승어선 80척이 조업을 한 적도 있다. 1910년도에는 그 수가 크게 줄어 14척~15척으로 줄었다. 연승어선은 나가사키현, 가가와현, 히로시마 현에서 진입을 했다. 나가사키 현에서 온 어선은 비양도를 근거지로 매년 8~9월에 조업을 한다.

이외에도 나가사키 현에서 온 어선이 1월에서 4월 말까지 볼락, 붉바리 등 기타 잡어들을 어획하는 어선이 3~4척 정도가 있고, 자망도 1척이 있었다. 어획물은 10일간 염장한 후 나가사키 현에 전량 판매한다. 볼락가격은 100근당 10원에서 112원 정도이다.

한편 1883년에 재조선국일본인민통상장정(在朝鮮國日本人民通商章程)이 체결되고 이 규정에 따라 일본인에게 어업허가를 주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이 어선을 들여와 조선영해에서 조업하는 어선수가 급증하게 된다. 1910년을 기점으로 조선총독부가 일본 어민들을 지원하면서 우리 어장을 독점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1911년 어업령을 공포해 일본 어민들을 적극적으로 지원을 하는 한편 수산물 침탈과 억압을 받게 된다. 일제에 빼앗긴 어업권을 회복하고 수호하기 위한 어민항쟁이 전국적으로 전개되기도 했다. 예컨대 제주도에서도 수취 가격 횡포, 노동력 착취, 어장 침탈 등에 항거해 1932년 해녀항쟁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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